[공감과연대]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 파행과 특별법 제정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입장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 파행과 특별법 제정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입장

치유는 실재적 진실에서 시작됩니다

정녕 진실은 장터에서 비틀거리고 정직은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이사 59.14).

무고한 이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속수무책 바라본 지 어느덧 100일이 가까워옵니다. 계절은 바뀌었지만 남겨진 이들의 통곡과 울음만 더욱 깊어졌을 뿐입니다. 일상은 고사하고 생계조차 잊은 채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경향각지를 동분서주하며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피붙이 잃은 이들의 애끓는 모습은 벌써 익숙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유족들의 삶은 절단 났지만 세인들은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잔인한 시간입니다. 눈물이 범람해 온 땅을 적셨지만 불행히도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조와 수습, 조사 모두 부실과 졸속, 구태의연뿐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속수무책, 망연자실의 그날 아침에 머물러있습니다. 아직도 11명이 배 안에 갇혀있습니다.

참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처한 위태로운 실상을 낱낱이 드러냈고, 진지한 성찰과 숙고를 불러왔습니다. ‘이것이 국가인가’란 분노와 탄식부터, 참사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까지, 인간존엄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성 등, 지금까지 외면했거나 소홀히 여겼던 무형의 가치들이 진정 안전한 나라를 담보하고 개인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탱하는 근간이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와 자본제일주의에 압도되어 방향을 상실한 인간 군상들의 의미 없는 항해에 큰 경종이 울린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고한 목숨들의 마지막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성찰이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과 같은 사후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들의 논점을 희석하거나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참담함에 부지불식 일조했다는 국민 모두의 자발적이고도 겸허한 숙고는 참사의 분명한 책임과 죄과를 묻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에 앞서 오히려 뼈아픈 자성과 환골탈태를 다짐해야하는 것은 정부입니다.

그러나 5월 19일 참사 이후 한 달 만에 처음으로 국민 앞에 선 정부 최고 책임자의 일성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정부 스스로도 강조하듯 이번 참사가 오랜 관행과 무사안일, 관료주의 등, 이 사회의 ‘일소’되어야 할 ‘적폐’들이 낳은 끔찍한 결과물이지만 그에 대한 조처와 수습은 여전히 ‘일소’와는 거리가 먼 표피적이고 미봉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해양경찰청의 해체와 국가안전처 신설 등은 근원적 치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을 모호하게 만드는 꼬리 자르기, 희생양 삼기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처방은 모든 규제를 ‘악’으로 규정하는 현재의 국정기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규제는 도리어 건강한 사회를 보증합니다. 이윤만을 추구한 기업과 관료들의 적폐로 빚어진 참사 앞에 ‘규제는 악’이라는 기조의 유지는 자기모순입니다. 붕괴된 공동체성과 국가에 대한 신뢰의 회복을 위해서는 ‘국가 개조’와 같은 추상적이고 과격한 구호 이전에 전면적인 국정 기조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책임을 지라는 명령전달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근본적 치유와 쇄신의 시작은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국정조사는 이미 이대로는 참사의 실체적 진실에 다다를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를 비롯한 국정조사에 임하는 피감기관들의 불성실한 태도나 여야를 막론한 조사위원들의 안일한 태도와 의지도 실효적 결과와 진정성에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이러한 흐름으로는 지금까지 대형 참사 이후 무수히 생겨났던 법안과 규정들처럼 결국 시간이 지나면 유명무실해지는 형식적 결과물을 쏟아내는 것으로 그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내용을 담보할 법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일을 하라고 국민이 위임한 자리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생명과 인간 존엄의 문제에 여야의 대립과 갈등은 없어야 합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이 죽음의 진상을 밝혀 달라고 애타게 호소하고 다니는 사회는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에 앞서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인간 존엄을 모든 국정가치의 최고에 두어야 마땅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몫입니다.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이제라도 정부와 국회는 성역 없는 조사가 가능한 법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형 참사 이후 숱하게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 실효성 없는 형식적 법안과는 분명히 다른 구속력 있는 법안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법안을 통해 설치될 조사위원회에는 반드시 조사권과 기소권을 비롯한 사법권한과 함께 독립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시민과 희생자 가족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여야는 물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모두 희생자 가족들이 제안한 “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가칭)”의 조속한 제정을 위해 힘을 모아주시길 촉구합니다.

우리는 실재를 가리는 온갖 것들을 거부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231항). 공허한 미사여구나 형식적인 공감은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재를 분명하고 공정하게 밝혀내야만 치유가 가능합니다. 그때 비로소 실재적인 행동을 동반한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참사의 진상 규명은 치유를 위한 가장 기초적 단계입니다. 또한 이 위기로부터 새로운 내일이 태동하길 희망합니다. 과거의 상처와 참상들, 자신들의 과오마저도 끈질기게 직시한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사회의 철저함이 그들에게 오늘의 평화와 안녕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다시금 역사의 교훈 앞에 우리를 겸허하게 합니다.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끝으로 이번 참사로 희생된 무고한 이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큰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과 남아있는 모든 이의 치유와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2014년 7월 14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 용 훈 주교

“한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 시대가 인간 삶의 충만함이라는 진정한 대의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로마노 과르디니-